나눔편지—250218
[강철근 나눔타임스 주필]
광장으로 내몰린 민심들
지금 보수 우악과 진보 좌익으로 양분된 우리 사회는 안개 자욱한 시계 제로의 상황에 처해 있더, 갈 바 모르던 민심들은 모두가 저마다의 관점으로 시국을 내다보다가 드디어 광장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마치 그 옛날 자유의종을 난타하는 갈구하는 심정으로…. 그들은 원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선(common good)을 원한다.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정의를 원한다.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선
이제 우리는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질문할 것이다. 그 주제는 오직 한 가지, 그것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화두이다. 정의(Justice)이야기, 우리 사회 모든 영역에서 각자 한 마디씩 할 말이 있을 것이다. 해서, 이 문제에 대한 접근은 아주 조심스럽게 해야할 것이다. 아차하면 재미 하나도 없는 도덕 이야기가 될 수 있으니, 사례중심으로 간결하게 흥미롭게 다뤄야 하는 이야기다. 우리시대를 말하고 증언하겠다고 스스로 약속한 사람으로서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우리나라와 같은 민주사회에 살면, 지속적으로 정의와 부정의, 평등과 불평등, 개인의 선택의 자유와 공동선을 둘러싼 논의를 숱하게 목격하거나 직접 체험하게 된다. 작년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사기꾼들이 서민들의 등골을 빼먹고 도주한 티메프 사태가 그중 하나다. 우리는 의문을 가진다. 정부는 왜 무슨 근거로 국민의 혈세로 그들 사기꾼들을 지원하는가? 소상공인들의 피해 보전을 위해서? 소비자들의 여행대금 환불을 위해서? 아니면 저 사기꾼들의 피해를 보전하기위해서? 아마도 소상공인들의 열악한 자금상태를 보전해야 우리 경제가 순환하기 때문이며, 소비자들의 피해를 보저해줘야 국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본질적인 질문은 계속된다. 모든 것은 그들이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다. 왜 다른 곳에선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주장하면서 이 때는 그 자유를 제한 또는 방치하는가? 묵묵히 자신의 일에 성실하게 매진하며 살아가는 보통의 서민들은 그 노릇을 멍하게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가? 공적자금 지원은 무엇에 대한 보상일까? 저 사기꾼들의 탐욕에 대하여 정부는 정말 공동선을 위해서(국민경제의 온전한 순환을 위해서)일까? 저 잘나고 똑똑한 국회나 정부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왜 아무런 말도 반대도 없을까? 혹시 정부여당과 야당 양 진영이 광폭한 저들의 집단표심 때문에 눈치보고 있나? 그렇다면 우리들 이웃의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코딱지만한 가게를 지키며 열심히 일하고 있는 김씨 아저씨 가족과 다른 선량한 소상공인이나 힘없는 국민 개개인은 이렇게 무시해도 좋은가? 여기에서의 정의는 무엇인가? 국민 개개인의 선택의 자유와 정부의 공동선은 이렇게 자주 충돌한다.
인간의 존엄성 문제
이제 다른 사례를 보기로 한다. 2005년6월 미 해군특수부대(네이비 씰) 소속의 마커스 하사와 부대원 3명이 오사마빈라덴의 최측근이며 가장 위험한 탈레반 지휘관과 그 부대를 정찰하기 위해서 아프가니스탄 산악지대에 잠입했다. 나무그늘에서 잠복하고있던 중 늙은 농부 부부와 어린아이가 염소 100여 마리를 몰고 지나가다 마주쳤다. 부대원들은 바로 그들을 체포하고 논의에 들어갔다. 당연히 모두 사살해야 한다는 주장과 비무장한 늙은 농부 부부와 어린아이를 어떻게 죽이냐는 의견이 강렬하게 부딪쳤다. 결국 마커스 하사가 최종결정하게 되었는데, 그의 고민은 매우 컸다. 마지막으로 크리스쳔으로서의 양심?이 그를 약하게 만들었다.
우려했던대로 그들을 놓아주고나서 바로 한 시간 후에 산속 사방에서 탈레반 강경군대가 새카맣게 들이닥쳤다. 결국 그의 병사 3명은 사살되었고, 그들을 구출하러온 네이비씰 병사 16명이 헬리콥터 탄채로 박격포에 모두 산화했다. 총19명이 사살되었고, 마커스 하사는 만신창이 몸을 가까스로 피해 살아남았다. 그는 후에 “나의 남부촌놈으로서의 개뿔같은 양심이라는 허울 때문에 동료들을 모두 죽였다. 죽고싶을만큼 나의 결정을 후회한다. 동료들이 뭍혀있는 국립묘지에 나는 죽어도 못간다”고 하였다.
도덕적 정의의 딜레마 문제다. 이는 강간으로 임신한 경우에 낙태가 허용될 수 있는가와 같은 문제다. 이때야말로 심각한 자기성찰이 필요한 때다. 동시에 동료들과의 진지한 논의도 필수적이다. 아무리 적진이라도 비무장한 시골 늙은 농부 부부와 어린아이를 정말 죽일 수 있을까? 비록 결과를 예견한다해도 진정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그 경우에 처하게 되면 어떻게 처리할까? 만약 지금과 같은 한국 정국 상황 하에서 한국군이 그 경우에 처하고 그들 모두를 사살한다면, 아마 그들 한국군은 이 땅에서 발붙이고 살기 힘들 것이다. 죽는 날까지 악독한 비인간적인 사람들로써 비난받으며 살게 될 것이다. 어느 해군가족들처럼 미국으로 이미이라도 가야할 것이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는냐며 특검이다 특별청문회다 대통령 탄핵이다 하며 온 국민의 비상한 관심 속에 나라가 시끄러워질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인권의식이 강한 나라는 이 문제를 다루기 정말 힘들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 철학을 알고 있다. 즉 저들 농부가족 3인들의 목숨보다 우리 군 19며의 목숨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도 역시 양 진영 간의 피나는 격론이 벌어질 것이다. 어느 쪽을 지지하느냐에 따라 우리들의 입장은 분명해질 것이다.
무엇이 정의일까? 공동선은 무엇일까? 여기에서도 물론 진영의 문제가 나올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자유보수진영의 논리와 좌익 진영의 입장은 확연히 다를 것이다. 그 최종판결은 필자가 중언부언할 것이 아니라 여러분 각자에게 맡겨야 할 것 같다.(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