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 타임스 주필 강철근]
누가 가난하래?
누가 아프래?
누가 무식하래?
누가 늙으래?
“상대방이 만만하게 보인다면 그 사람은 당신을 배려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 속담이다. 정말 그러하다. 특히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만만하게 보였던 백성들이 항상 나라를 생각하고 배려해온 나라였다. 파워 엘리트나 고학력 집단에게 사회적 배려나 애국심을 기대하기 어렵다.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지금껏대략 그래왔다.
만약 우리가 평소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지는 질문 범위가 위와 같을 때, 우리사회는 어떤 모습이 될까? 솔직해져보자. 우리가 가지는 질문은 위에서 벗어나 있을까?
20세기 중반부터 지금까지 세계의 경제 정치 사회 문화를 휩쓸고 있는 신자유주의를 생각한다. 이는 시장의 자연성과 민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중시하는 경제이론인데, 1970년대 이후 정부의 시장개입으로 대표되는 케인즈 이론에 대한 비판과 초국가적 자본의 세계화를 배경으로 등장했다. 1980년대 영국의 대처리즘과 미국의 레이거노믹스가 대표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이다. 그들은 비효율적 국영기업의 민영화, 복지예산의 축소, 최소의 정부, 노동의 유연성 확보 등을 통한 시장 활성화를 표방했다. 당시 영미 두 나라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전 세계 나라들에게 태풍처럼 몰아닥쳤다. 물론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가장 모범적으로 해치웠다.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YS DJ 양 시대에 정부에 있었던 사람으로 당 시대를 그리 아름답게 기억하지 못한다. 어느날 갑지기 들어닥친 일단의 젊은 전문가라는 친구들이 자신들이 미국서 MBA 마치고온 혁신 전문가라고 밝히면서 정부 구조와 효율성을 진단하고 재구조조정하겠노라 하면서, 우리들을 죽 앉혀놓고 마치 죄인 신문하듯이 몇날 며칠을 괴롭혔다. 우리는 풀이 죽어서 그들이 요구하는 자료와 신문에 공손히 답하였다. 청와대에서는 매주 규제개혁대회를 열어 각 부처에 주어진 규제개수를 무조건 반 이하로 줄이라는 지시를 하였다. 우리에게는 2750개라는 규제 중에서 싸우고 싸워 약 천여개 정도로 감했다. 외부전문가들은 하나라도 더 많이 우리는 하나라도 덜 줄이는 싸움을 하였다. 그들은 역시 관료들은 규제로 먹고 살고 있네요라고 비아냥댔고, 우리는 그 규제의 의미와 역사 그리고 사회적 파급효과를 논했다. 예컨대, 트럭이 1차선을 지나가지 못하는 이유를 놓고 그들은 왜 그런 규제를 하느냐 했고, 우리는 그걸 풀면 교통이 막힌다고 말했다. 인사검증제도에 대해서도 그들은 왜 거기서 검증을 하느냐 했고, 그걸 각부처에 맡기면 서로 감싸주고 검증이 안된다 했다. 하여간 당시 엄청나게 많은 규제를 풀긴 했다.
우리는 언제나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부의 정책이념과 사회체계에 따라 엄청나게 달라진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국가의 개입으로부터 시장을 자유화하고 시민사회 내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이 가능한 시장 자체의 자연적인 움직임에 따라 조절 및 해결되도록 하는 이론이다.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는 것을 반대하고 자유로운 시장을 통해 국가의 부를 확대시켜 사회적 복지를 극대화해야 한다는 19세기 고전적 자유주의 이론을 발전시킨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가지지못한 자들, 배우지 못한 자들, 몸이 아픈 자들, 그리고 나이 들어 심신이 옛날같지 않은 자들이 모두 갖은 일을 하며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지를 묻는 일이 남아 있다. 즉 사회 공통의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선, 공공선을 어떻게 추구할까? 기회의 평등을 말하면서 능력주의의 깃발아래에서 기회만을 공평하게 주어지면 소임을 다 하는 것일까? 결국 나중에 그들은 말할 것이다.
그러게 누가 가난하래? 누가 아프래? 누가 무식하래? 누가 늙으래?
불행히도 신자유시대의 시장경제는 공공선을 이루는데 있어 매우 관료적 접근으로 하였다. 다시 말해서 수량적으로 기회의 평등만을 주장하였고 그것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회의 평등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책임회피에 불과한 정치적 구호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사회주의 세상에서 말하는 결과의 평등을 말하고자 하는 말은 더욱 아니다. 기회와 결과에서 주어지는 이념의 차이가 너무 크다는 문제의식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국이나 미국사회의 선거결과를 말함에 있어서, 언제나 그들이 속한 사회에서 상층부를 차지하는데 익숙했던 사람들이 겪었던 선거패배라는 이 생소한 경험들은 사태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엉망진창이 되고 있다. 만신창이가 되고 있다. 자신들의 승리라는 오래된 터전에서 배신당하고 있는 이 상황을 그들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이러다가는 앞으로도 또 다시 깨지는 일만 남았다.
그들의 저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질문 혹은 외침 내면의 소리들을자신만의 마음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누가 가난하래?” “누가 아프래? ”누가 무식하래?“ 이것이 그들의 마음 속의 본심이다. 이런 질문 아닌 질문, 답변 아닌 답변이 우리 모두를 병들게 한다. 겉으로만 번지르한 말의 잔치는 단 한 마디도 전달되지 않는다. 우리는 다 알고 있다. 어떤 말이 주는 의미가 모언지. 서로 알면서 모른 체 하고 있을뿐이다. 사회통합?구호만으로 그게 될까? 왜 저들 루저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행하고 있는 이 반란과 배신의 정치현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실로 트럼프는 루저들의 표를 얻었다.“ 이는 내 말이 아니다. 이는 미국의 한 언론의 말이다.
우리는 일찍이 케네디가 그의 대통령 취임사에서 했던 멋진 구호를 다시 새겨본다. ”국가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생각하기보다, 여러분 개인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먼저 생각해야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야말로 신자유주의의 대국만 선전포고였다. 사회정의는 사회복지의 가는 길 정문 앞에 서있다. 사회적 약자들이 겪어야 하는 필요와 요청이 결코 그들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일 때. 사회정의는 실현된다.To be 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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