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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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4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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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타임스 주필 강철근]
사문연과 토인비 홀의 추억
장편소설 <대학로>에서 이미 말했듯이, 대학시절에 소위 이념써클인 “사회문제연구회”에 가입해 죽어라 매진했던 추억이 있다. 우리는 이 써클을 “사문연”이라 약칭했고, 마치 전사처럼 여기에 전념했다. 우리 사문연은 많은 활동을 했는데, 그중 몇 가지 빛나는 일들이 기억나는데, 사회문제를 현장에서 체험한다고 구로동 판자집이나 강남 아파트 공사장에 파견나가 인부로 함께 일했다. 그런데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없는게, 나같은 사람들은 절대 그 근처에도 접근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공사장 감독이나 판자집 동네 이장이 미리 알고 학생들이 여기 오면 안 된다고 강하게 밀쳐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다고 가만있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 선정기준을 가지고 자체선발했는데, 어떤 친구들은 인부들보다 더 인부같은 외모와 체격을 가자고 있어서, 그들을 내보냈다. 나는 할 수 없이 쭈구리고 앉아서 사회정의에 관련된 “페다고지” 등 외국책들 정리해서 연구보고서를 나눠주는 일이나 했다.
장황한 옛날 이야기 하는 이유는 사회문제와 사회정의는 사회복지의 가는 길목 맨앞에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의 우리들은 사회문제를 대하면서, 문제 자체로 보지 않고 마치 정치문제를 대하듯이 비장하고 전투적으로 이 문제를 다뤘다. 왜냐하면 사회문제는 오직 노동문제와 빈민문제로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차분한 연구와 사색 그리고 현장상황에 대한 철저한 대책보다는 다소의 흥분과 투쟁심만 넘쳤다. 학생운동이 늘상 그러하듯 구호만이 넘쳤다. 결과는 허탈함과 분노만이 남게되었지만…. 우리들이 생각하는 사회문제는 정치문제 그 자체였다.
사회복지를 다시 생각하는 지금 안타까움과 후회만 가득하다. 그 이유는 당시의 우리가 갔던 길은 그토록 절실하고 비장한 결의에 찬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놀랍게도 이미 영국과 미국의 학생들이 백년 전에 시작한 것이었다. 그들은 차분한 연구와 치밀한 행동을 이미 백여년 전부터 다져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도시빈민운동 19세기 중엽 영국의 옥스퍼드와 캠브릿지 대학생들이 목사들과 함께 런던 외곽의 빈민가에서 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당시 그들이 그 일을 준비하면서 세웠던 장소가 1884년의 인보관 사업장(Settlement House) 즉 토인비 홀이었다. 그 토인비홀은 아직도 런던에 건재하다. 그것이 오늘날 전 세계에 퍼진 사회복지관의 효시다. 그것은 바로 후에 미국의 시카고 헐 하우스에 전승되었고,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킹스레인 홀로 연결되었다. 우리는 종로 태화관에서 1921년에 시작하였다. 물론 미국인 선교사 메리 마이어스가 시작한 것이었다.
오늘날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런던을 방문하여 그 당시 젊은 학생들이 뜨거운 가슴으로 행하던 시민사회운동(빈민운동과 사회혁명)을 하던 토인비홀을 잔잔한 감동으로 당시의 열정을 느껴보는 장소로서 추억한다. 물론 우리의 질풍노도의 시기였던 70년대의 태화관이나 대학로의 흥사단, 카토릭기념관, YMCA등을 가슴 뜨겁게 추억한다. 아, 당시의 젊은 열정들을 어떻게 이야기할까? 그때의 우리 동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물론 그중 상당수는 아직도 연락하고 만나고 같이 놀기도 한다. 하지만 언제나 정말 할 말은 가슴 저 깊은 곳에 묻어둔 채 그냥 즐겁게 웃고 떠든다. 손주 얘기와 늙어버린 부인 얘기와 나훈아 은퇴 얘기를 한다. 하지만 그게 다는 물론 아니다.
토인비홀이 세워진 1884년은 30대 초반의 155cm의 키를 가진 김옥균이 위로부터의 혁명인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실패로 끝나 장렬하게 효수된 해이다. 아쉽고 가슴아픈 일이었지만 그것이 우리 선배들이 걸어온 길이니 서러워할 것은 없다. 당시 우리 백성들은 기독교 모임에 몰래 드나들면서 그 무시무시한 반상 구분이 아직도 극심한 상황에서 남녀노소 모인 사람들끼리 서로 자매님 형제님 하면서 신분을 잊어버리고 평등사회를 만들어갔다. 그증 대원군의 부인도 함께했다. 당시의 기독교는 이땅에 민주와평등 사회정의를 통해서 사회복지의 씨앗을 뿌렸다. 일제 강점기에도 전국의 사회복지관을 통해 계속 씨앗을 뿌려나갔다. 31운동을 준비한 곳도 태화관이었고, 만세운동의 불씨도 YMCA같은 대부분의 사회복지관에서 준비했다.
선각자 흥사단의 도산 안창호 선생, YMCA의 월남 이상재 선생, 태화관의 만해 한용운 선사 등이 그런 사회운동의 선구자들이었다. 그들은 실로 일제하 우리 백성들의 사회문제를 온몸으로 마주하고 헤쳐나갔다. 그들이 일했던 그 사회복지관은 아직도 그들의 향기가 그득하다.
사회복지 운동을 왜 하는가? 나는 이제부터 찬찬히 하나씩 그 이유를 말하도록 하겠다.to be 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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