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 타임스 주필 강철근]
“개혀?” “아니, 요즘 하도 GR들을혀서 참고있어. 하이고 요즘 그거 했다간 완전히 야만인 취급당혀. 에이고 안하고 말지.” “말도 말어, 우리집에선 마누라하고 딸년이 강아지를 두 마리나 방에서 키운다니까. 내참 더러워서. 난 찍소리도 못혀!” “그려, 참어” 지하철에서 마주친 아저씨들 대화 내용이다.
뉴욕타임스가 얼마 전 르뽀 기사에서 “한국인들은 참 요상허다(weird). 불과 몇 년전까지 개들을 볶아먹네, 삶아먹네 하면서 잡아먹더니, 갑자기 그 비싼 사람 아기들의 유모차에 태우고 모시고 다닌다. 그냥 몇몇 사람들의 호사 취미가 아니라 이미 대중화된지 오래다.” 나도 전적으로 동감이다. 물론 나도 먹진 않지만, 길에서 유모차 지나가면 아가보다 강아지가 더 많이 타고 있어서 아에 쳐다보지도 않는다. 나도 모르게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서다. 한국에서 개 복지는 이미 완성된 듯.
갑자기 개 타령을 하는건 그 얘기 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사회복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내가 요즘 사방에 다니면서 복지 복지 하니까 많은 동지들이 당신 사상전향한거냐?고 따져 물는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당신 보수에서 좌익으로 간거냐? 하고 따지는 거다. 이에 대해 고 이병주 작가 식으로 말하면 “시대와의 화해 혹은 시대를 위한 변명”을 하고 싶은거다. 아울러 복지에 대한 평범한 설명을 하고 싶은거다. 우리는 복지에 대해 아는 듯 하지만 실은 잘 모른다. 나도 그랬다. 금년들어 제법 긴 시간 공부해보니, 아, 이건 아주 오랫동안 공부하고 매달려야할 주제라는 확신이 들었다.
복지는 요컨대 인간의 존엄성을 옹호하고 사회통합을 이루는 길이다. 거창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이를 다시 말하자면, 사회복지는 기회의 평등과 능력주의의 뒤안길을 찾아 빛을 주는 것이다. 미국과 달리 기회의 평등은 최소한 한국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말이다. 한국에서 얼굴색, 출신지방, 집안배경이 문제시 되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기회만 평등하면 다 되는 것일까? 가령 태생적으로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청소년들, 부모로부터 버려진 고아원에서 자라난 청소년은 20살이 되기 전에 고아원에서 나가 독립해서 살야힌다. 대체 나이 어린 친구들이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란 말인가? 그들은 직장에 들어가려해도 보증인이 없어 취업이 거의 불가능하다. 또한 자녀로부터 버려진 빈곤한 노인들도 마찬가지다. OECD국가 중에서 한국은 노인빈곤율이 첫 번째이며, 선진국 노인들의 일하는 연령보다 한국의 노인들이 가장 높다. 즉 65세 이상까지 일하는 노인 비율이 가장 높다. 또한 장애인들은 어떠한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은 어느나라나 매한가지지만 특히 한국이 가장 심하다. 그들은 일할 데도 없고 가야할 곳도 없다. 심지어 장애아 학교조차 정상아 학부모들의 반대로 섣불리 지을 수도 없다.
무식하고 가난한 노인들은 무료 요양원에서 버려진 채로 버티다가 결국 행려병자로 취급되어 이름없이 죽어가고 묻힌다. 2년전 세모녀 집단 자살사건에서 보듯이 정말 극심한 가난에 대하여 우리사회는 차갑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요즘 취업하면 누구나 일정금액은 받는데 무슨 소리냐고 하겠지만, 그 모녀는 오랫동안 지병을 앓고 있어서 도저히 일할 수가 없었다. 아무도 들여다 보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집단자살로 마감했다. 사후약방문으로 매스컴만 시끄러웠다.
현대의 복지국가에서는 지난 시절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빚지며 살고 있는가 라는 사회연대의식보다는 개인책임을 앞세우는 책임문제로 이동 중에 있다. 다시 말해 사회연대의식이 점차 희박해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신봉하는 신자유주의의 강력한 영향인데, 이는 보편적 사회연대책임보다는 사회적 약자의 자기책임이 더 강하게 중시되는 세상이 되었다는 말이다.
결국 모든 것은 능력주의의 문제로 돌아간다. 세계의 선진국의 모든 정치지도자들은 국민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한다. “누구라도 자신의 능력으로 열심히 일한다면, 그리고 자신의 책임을 다한다면, 성공의 가도를 달릴 수 있으며 신분상승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능력주의자들은 사회적 약자를 돕는다는 것에 대해서 약자들을 다시 구분했다. 자신의 불운에 책임져야할 사람과 운이 없었던 사람을 구분했다. 자신의 불운에책임이 없는 사람들만이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논리를 가진다.
앞서 말했던 사람들, 즉 고아 청소년들, 장애인들, 돌봄이 필요한 무연고 노인들, 세모녀들 그들 모두는 자신의 불운에 책임이 있을까? 우리는 그들에게 빚지고 있는부분은 혹시 없을까?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업성은 어떻게 지켜질까? 그들을 제외하고 사회적 연대와 통합을 말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는 우리의 현재를 누릴 충분한 자격이 있는 것일까? 우리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은 끝이 없다.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통합을 이루는 이데올로기는 누가 어떻게 만들어 갈까? 지금 현재 여기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일단 사회구성원 서로가 만들어가는 사회복지가 그 답이다.to be con.
(앞으로 사회복지 씨리즈로 써나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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