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로서 이성적 권위

우리나눔신문 승인 2021.07.05 09:57 | 최종 수정 2021.07.05 10:00 의견 0
최운선 우리나눔신문 칼럼리스트

<최운선 교수의 행복메시지>

부모로서 이성적 권위

우리나라 일부 청소년들은 부모를 존경하지 않는다고 한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평생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부모들이 이 말을 들으며 매우 섭섭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청소년들은 오히려 부모들이 존경받을 만한 일을 했느냐고 반문한다. 이 말에 부모들은 억장이 무너진다. 그렇다면 청소년들이 이처럼 부모를 존경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부모가 지녀야 할 이성적 권위가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존경심이라는 것은 맹목적인 사랑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데 힘쓰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는 이 성적 권위를 부모들이 스스로 포기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성적 권위를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의 영혼 속에 부여되어 있지는 않다. 그 능력은 단지 우리가 살아가는 어느 지점에 이상적인 목표로서만 존재하고 있다. 그 능력은 단지 우리가 살아가는 어느 지점에 이상적인 목표로서만 존재하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자녀를 위한 이성적 권위에 대한 인식을 부모들은 새롭게 해야 한다. 따라서 자녀를 위한 이성적 권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부모로서 자신의 인생 자체에 걸려 있는 문제들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 예를 들면 열등감, 분노, 슬픔 그리고 부모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지 않는 습관 등을 탐구하면서 그러한 것들의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부터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자녀에 대한 사랑의 진실이 무엇인가를 부모 자신부터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스스로 이성적 권위를 찾을 수 있다. 이성적 권위란 자녀에 대한 애정 관계가 달콤한 꿈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 영혼 전체에 대한 도전과 시련의 세계이다. 이제 부모들은 자녀의 진실한 행복과 자녀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많은 노력과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내가 내 자녀로부터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눈을 감고 내 자녀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외로울 때마다 ‘어딘가에 너를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모로서의 이성적 권위를 찾는 길이다. 다음은 어느 의사의 진실한 고백과 어머니에 대한 진정한 참회가 담긴 글이다.

제 어머니는 시장 한 귀퉁이에서 나물을 파셨습니다. 다리도 불편하신 몸으로 매일 시장 귀퉁이로 나가 나물을 팔던 어머니, 그러나 저는 그런 어머니가 싫었습니다. 어린 시절, 저에게 있어 시장 근처를 지나는 일은 너무나 큰 고통이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시장 근처를 지나고 있을 때 다리까지 불편한 어머니가 갑자기 나를 부르면 어???하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저는 솔직히 말해 초라한 어머니가 정말로 싫었던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 없이 자라면서, 궁색한 살림과 가난 그리고 초라한 어머니가 정말로 싫었습니다. 원래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시던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공사장에서 사고를 당해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한쪽 다리를 다치셨던 것입니다. 그 이후부터 어머니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시장바닥에 나가 나물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초라한 엄마와 가난이 싫어 더욱 공부에만 매달렸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제가 이토록 초라한 엄마와 가난이 싫어 더욱 공부에만 매달렸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제가 이토록 초라하고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공부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끔 어머니가 절룩거리는 몸으로 학교로 찾아올 때면 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외면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반드시 성공하겠다. 아버지, 어머니처럼 초라한 삶은 살지 않겠다.’ 결국, 저는 의사가 되었고 어릴 때의 소원처럼, 어머니와 나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곧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얘기도 된다. 그러나 이러한 말뜻을 몰라서가 아니라 우리는 살면서 말처럼 될 거라는 믿음보다 마음먹은 대로 되질 않는다고 하소연한다. 그렇다 보니 무슨 일이든 너무 쉽게 포기한다. 그러나 이처럼 훌륭한 믿음의 말들을 혹시, 자기 행동에 혼처럼 불어넣을 수 있는 지혜와 확신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닐까? 병(甁)에 물을 담으면 ‘물병’이 되고, 꽃을 담으면 ‘꽃병’이 되고, 꿀을 담으면 ‘꿀 병’이 된다. 통(桶)에 물을 담으면 ‘물통’이 되고, 똥을 담으면 ‘똥통’이 되고,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된다. 마찬가지로 그릇에 밥을 담으면 ‘밥그릇’, 국을 담으면 ‘국그릇’, 김치를 담으면 ‘김치 그릇’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병(甁)이나 통(桶)이나 그릇 안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꿀 병이나 물통이나 밥그릇 등 꼭 필요한 것을 담은 그릇들은 자주 담아 깨끗하게 하고 좋은 대접을 받는 것처럼, 우리 마음속에 담겨 있는 것들이 어떠하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이 만들어지고, 그 됨됨이에 따라 남에게 존경을 받을 수도 있고, 푸대접을 받으며 천덕꾸러기가 될 수 있다.

어느 부부의 이야기다. 부부지간임에도 차마 자신의 속내를 잘 말하지 못하는 아내가 있었다. 아내는 항상 남편에게 하얀 와이셔츠만을 사다 주었다.

“또 하얀 와이셔츠야?”

“당신은 하얀색이 잘 어울려요.”

“그래도 좀 다른 색깔로 사 오지.”

남편은 아침부터 아내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하얀색이 아닌 좀 다른 색으로 사 오라고 해도 매번 말을 듣지 않는 아내에게 볼멘소리로 말했다.

“이 와이셔츠 도로 바꿔 와”

남편은 몇 달째 하얀 와이셔츠만 입고 출근하기가 창피했다. 그날따라 아내는 혼잣말로 ‘그래도 당신한테는 하얀색이 잘 어울리는데…….’ 하면서 방바닥에 펼쳐져 있는 와이셔츠를 차곡차곡 개더니 이내 눈물을 흘렸다. 순간 남편은 그제야 자기가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들어 아내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한참을 안아주었다. 그리고는 별수 없이 아내의 눈물이 젖은 와이셔츠를 입고 출근을 하였다. 남편이 동료들과 점심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아내에게서 한 통의 메일이 와 있었다.

“아침부터 당신 화나게 해서 미안해요. 아직 당신한테 얘기하지 못한 게 있는데요. 말로 하기가 참 부끄러워 이렇게 메일로 대신해요. 제가 어렸을 때 가장 부러워했던 게 뭔지 아세요? 옆집 빨랫줄에 걸려있는 하얀 와이셔츠였어요. 우리 아버지요, 단 한 번도…. 와이셔츠를 입어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어요. 물론 와이셔츠하고는 거리가 먼 환경미화원이셨지만 줄줄이 셋이나 되는 우리 가족 뒷바라지에 새 옷 한 벌 입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알뜰하고 검소하게 살다 가신 분이세요. 그래서 전 당신 만나기 전부터 이런 결심도 했지요. ‘난 꼭 하얀 와이셔츠를 입을 수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과 결혼해야지.’ 결국은 제 소원대로 당신과 결혼을 했고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출근하는 당신을 보면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그런데 이제는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출근하는 당신을 보면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그런데 이제는 하얀 와이셔츠를 사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화내서가 아니에요. 이제야 알았거든요. 하얀 와이셔츠를 입어 보지 못한 나의 아버지가 얼마나 자랑스러운 분 인지를요. 늘 굽은 어깨로 거리의 이곳저곳을 청소하러 다니시는 나의 아버지야말로 하얀 와이셔츠만큼이나 마음이 하얀 분이라는 걸요.”

남편은 그제야 아내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곧장 휴대폰을 꺼내 아내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여보 나 지금 뭐 하고 있는지 줄 알아? 아침에 당신이 하얀 와이셔츠 소매에 흘린 눈물 자국 위에 입맞춤하고 있어. 사랑해. 진심으로!”

그렇다. 서로에 대한 배려를 마음에 담아낸 사랑스러운 부부의 모습이 아름답다.

우리 삶에서 편견이나 불평, 그리고 무심함과 아집으로 채워진 그릇들은 이제부터라도 깨끗하게 비워내자. 대신 배려, 겸손, 감사, 사랑을 가득 담아 윤기 나게 닦아주자. 그런데 우리가 어디에 무엇을 담느냐 하는 것은 그 어느 누구의 책임도 아니고 오직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친구를 사귀어서 외롭지 않게 해주고, 가끔은 멋진 식당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식사하며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하고, 앎과 삶이 하나 되는 독서를 즐기며, 건강을 유지하도록 하루 30분씩 꼭 산책도 하고, 간혹 가족들에게 섭섭한 일이 있어도 금방 용서가 되는, 그래서 가끔은 펑펑 울어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마음의 그릇을 닦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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